그저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인 여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탈북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한영(이설)은 면접을 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준비 중인 건 관광통역안내사입니다. 탈북민인 그녀는 이 일로 정착해서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인 평범한 사람입니다. 사정상 지금은 동생과 둘만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어머니를 모셔와서 함께 사는 게 꿈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중간중간 어머니에게 보여줄 동영상을 찍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간단합니다. 탈북민의 한국 정착기라고 할 수 있지만 실은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에서 탈북민이기까지 한 그녀에게 녹록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한영을 연기한 이설은 실제 탈북민이라고 믿어도 어색하지 않은 만큼 안정적인 연기를 펼칩니다. 극 중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가기 위해 배웠을 중국어 연기도 일품입니다. 한영 친구로 등장하는 탈북민 정미 역할의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국어도 아닌데 관객들에게 완벽한 외국어를 구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모두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실제 중국인, 탈북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영이 정미가 만들어준 만둣국을 먹는 장면에서는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덩달아 배가 고팠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결국 만둣국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탈북민이라는 색안경을 낀 세상
한영은 자격증만 따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관광통역안내사 면접시험을 보면서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철칙에 대해 또박또박 대답을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을 모을 수도, 돈을 많이 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정을 받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한영은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다가 마침내 돈벌이를 위해 작심합니다. 이제 수줍고 서툰 한영은 없습니다. 관광객들에게 쇼핑 강매를 해서 하나라도 더 화장품을 팔아야 더 많은 수당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표정한 한영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런 한영은 고발을 당합니다. 한영의 쇼핑 강매 때문에 그녀의 회사는 사정이 어려워지고 결국 한영은 회사에서 해고당합니다.
그녀를 돌봐주는 경찰관의 소개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 면접을 보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냉랭합니다. 더 적응이 필요한 것 같다는 말 뿐이죠. 일을 해야 적응을 할 텐데 도대체 어디서 적응력을 키울 수 있는 걸까요? 한영은 어렵게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합니다. 어느 날 돈이 필요해진 한영은 사장에게 가불을 요구하지만 사장의 대답은 “탈북민을 어떻게 믿고 가불을 해줘?”라는 차가운 말뿐입니다.
한영은 더더욱 엄마가 보고 싶어 집니다. 한영을 보살펴 주는 경찰관에게 마음을 기대고 싶었지만 그가 보내는 호의는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이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는 것뿐이었죠. 유일한 친구 정미마저 남자친구와 이민을 가버리고 한영은 다시 혼자가 됩니다.
당신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영화는 한영이 짐을 싸서 공항으로 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녀가 중국으로 돌아간 건지 어디로 간 건지 명확한 행선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어스름한 새벽길을 떠나는 한영을 보면서 희망을 품고 싶었습니다. 잠깐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한영의 말처럼 이곳에서 탈북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쉬운 건 아니겠지만 함께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안정적인 현실을 마주할 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동안 제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탈북민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 영화였습니다. 그들을 대하는 나의 시선은 어땠나? 너무 차갑고 날 선 눈빛은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한영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탈북민이라는 세 글자가 지워지긴 쉽지 않을 겁니다.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일일 겁니다. 다만 그 세 글자를 이유로 희망을 짓밟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필요합니다. 한영에게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고단했던 현실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한영을 힘껏 안아주고 싶은 영화였습니다.